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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성장



 3·1운동의 인물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한국의 잔다르크’이며, ‘3·1운동의 꽃’이라 불리는 유관순 열사이다.


유관순(柳寬順)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중권씨의 삼남이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형제는 언니 계출(癸出)과 오빠 우석(愚錫), 그리고 두 동생 인석(仁錫)과 관석(冠錫)이다.


유관순은 기독교 영향을 받은 가정에서 출생하여 숙부가 선교사로 일하는 매봉교회를 다녔으며, 샤프 선교사 부인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큰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매봉교회는 1901년경에 설립되었으며,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는 등 애국운동을 펼치자, 그 해 11월 일병(日兵)의 방화(放火)에 의해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친척인 유빈기(柳斌基, 1883~1928)는 케이블(E, M, Cable, 1874~1949)선교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조병옥의 부친인 조인원(趙仁元), 유관순의 숙부인 유중무 등과 1908년 이 교회를 재건하였다.


당시 목천군 일대는 산세가 험한 곳으로 일본에 의해 해산된 군인이 활발히 활동했던 지역이었다. 유관순은 그 외에도 이 지역에서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애국운동뿐만 아니라 독립군 활약상을 자주보고, 들으며 자랐다.


더구나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굽히지 않고 관철하고야마는 성격을 지닌 유관순은 이러한 성장과정을 통해 배일사상을 싹틔웠으며, 기울어가는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희생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와 신념을 키우게 되었다.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은 선교사 부인인 Mrs. Alise H. Sharp의 배려로 사촌언니인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편입학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학교생활에서도 매우 모범적이었다. 동료와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음은 물론, 무슨 일이든지 솔선수범하였으며, 남을 위해 돕는 일에는 언제나 가장 먼저 앞장섰다.


또한 유관순은 매우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번은 친구와 한밤중에 태극기를 70여장이나 그려서 서양선교사의 방과 기숙사 학생들의 방, 그리고 교실마다 붙였다. 이로 인해 다음 날 소동이 일어났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정확한 태극기 그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가는 곳마다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였다. 심지어는 가장 신성해야 할 교회에서조차 칼을 차고 들어와서, 보는 이로 하여금 비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스러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일깨우기 위해, 이화학당에서는 매주 금요일 저녁 이문회(以文會)를 통해 사회 저명인사를 초빙하여 시국에 대한 강연을 듣기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하던 유관순은 5인의 결사대에 참여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서거는 전 민족을 울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국민의 울분은 삼일운동을 촉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수많은 학생들은 연합하여, 3월 1일과 3월 5일에 일어난 서울 지역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화학당의 이문회에서도 2월 28일 열린 정기모임에서 3월 1일에 전교생이 소복을 입고 대한문(大漢門) 앞에 나가 망곡(望哭)을 하고, 만세 대열에 참여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학교 측은 이문회의 이러한 결정을 미리 알아차리고, 수위로 하여금 문을 잠그게 하였으며, 선생들이 교정 곳곳에서 지켰으나, 15명 정도가 수위를 밀치고 나가 군중과 합세하였다.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유관순도 이 비밀결사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유관순을 비롯하여 학우 6인의 결사대는 기숙사 뒷담을 넘어 파고다 공원으로 가서 만세를 불렀다. 3월 5일 서울역에서의 만세시위에서 유관순도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일제가 학생들의 맹렬한 시위에 놀라,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은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내려오는 기차에서, 덜컹거리는 기차소리를 친구들이 ‘동전 한 푼 동전 두 푼’하는 것 같다고 하자, 유관순은 ‘조선독립! 조선독립!’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아우내 만세운동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은 이제 고향 사람들에게도 만세시위의 불을 지펴야겠다고 마음먹고, 우선 교회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동안 서울에서 있었던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하며, 숨겨왔던 독립선언서를 내어놓았다.


거사일은 아우내 장터의 장날인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로 잡았다. 유관순은 한편으로는 시위준비를 하게하고, 자신은 사촌언니 예도(禮道)와 같이 일경의 눈을 피해 지역의 유지들은 물론 교회와 이웃 지역까지 찾아다니며 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설득하였고 이를 위해 밤새도록 태극기를 만들었다. 태극기를 그린다는 것은 매우 비밀스러운 작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태극기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유관순과 유예도 뿐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전담하여 밤을 새워 가며 그리게 되었다.


4월 1일 아우내 장날 아침, 거사를 미리 알고 찾아온 군중과 장사꾼으로 아우내 장터는 민족혼이 충만했다. 유관순은 군중들의 행렬을 정돈하며, 길목에서 광주리에 숨겨온 태극기를 일일이 나누어주고, 행렬의 선봉에 서서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프랑스의 순국소녀 잔다르크처럼 국가를 위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기도하던 평소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행렬을 이끌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였다. 행렬이 장터 복판에 이르자 쌀 섬 위로 올라가 우리의 독립의 중요성과 반드시 독립을 쟁취해야 함을 연설하며, 군중을 독려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도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가하였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곧 이어 조인원이 태극기를 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고 감격과 흥분에 휩싸인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가두 행진을 벌였다.


어느새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일본 헌병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이때 유관순의 부모님은 왜병의 총에 살해당했다. 결국 유관순은 사랑하는 부모님 두 분을, 이날 모두 잃고 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관순도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날 이곳에서 만세를 부르다 순국한 분은 모두 19명이나 되었다.



투옥, 투쟁, 그리고 순국



유관순은 천안 헌병대를 거쳐서 공주 재판소로 넘어갔다. 공주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는 공주 영명학교에서 만세를 주동하여 체포된 오빠 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일경은 유관순에게 갖은 고문을 하였다. 처음에는 어린애로 생각하고 배후를 추궁해 보았으나,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은 주모자가 자기라는 것 외에는 더 말하지 않아 아무 비밀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는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유관순은 1심 재판에서 비록 나이 어린 학생이었으나, 아우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보아 5년형을 받았다.


그 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의 판결에 이어, 중형을 받은 사람은 모두 다시 경성 복심법원으로 넘겨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곳에서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스승인 박인덕 여사를 만났으며, 이신애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초심법원인 공주 지방법원의 판결에 대해 일부 무혐의 처리를 하고, 형을 감량하여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유관순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에서 상고를 포기하고 1심만으로 사형을 맞은 것과 같이 日人의 재판을 거부하여 고등법원에 상소함을 포기하였다.


유관순은 일본인들이 판치는 이러한 세상에서는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옥중에서도 조석으로 만세를 외치며, 동지들을 격려하고, 고무하였다. 유관순은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더욱이 1920년 3월 1일이 되자, 3.1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옥중에서도 만세를 주동하여 일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1920년 3월 28일 영친왕의 일본인과의 결혼을 기념하여 모든 수형자의 형기를 반으로 줄이어 출옥시켰으나, 유관순은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인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이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는 뜻을 끝까지 지키다 결국은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렇게도 목메어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 19세에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이화학당 장인 웰터와 김현경 선생과 오빠 유우석 등이 시신을 수습하여 이화학당으로 모시었다. 그리고 출옥일로부터 삼일 째 되는 1920년 10월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한 장례를 지냈다. 그러나 이후 아쉽게도 유관순의 무덤은 훼손되어 찾지 못하였다.


그 후 1962년 3월 1일, 국가에서는 유관순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수여하고, 열사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69년 추모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 10월 14일 이를 사적 제 230호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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